시간을 여는 여유

경복궁을 돌아보면서

사색의 산책 2014. 8. 9. 14:31

 

 

    2014,08,07 경복궁을 아내와 함께 돌아보면서 1990년대에 보았던

경복궁의 모습과는 달리 많이 복원되어서 마음 한켠으로 감사와 기쁨을 느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태조3년(1394) 완공당시 넓이가 43만㎡로

1420년경 완공된 자금성이 72만㎡라고 하니까  시대적 상황이나  여러가지를

고려할 때 왕조의 그 위엄이나 역사적 평가에 자긍심을 가지기 충분하다.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탄 경복궁을 1867년 흥선대원군이 복원하기까지

조선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다시 찾는 과정속에서 우리역사의 아픈 편린들을

모아 보게한다.

 

    일제의 잔재로 경복궁앞에 상흔의 딱쟁이처럼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로 시작된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제

시작에 불과한것임을 느끼며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귀는 마음가짐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세종8년인 1426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준공되었으나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인 고종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정부종합청사 지상20층 지하4층 건물이 보인다. 광화문은 닫아서 이상한 말과 요사스런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이들을 들어오게 하는것은 바른것 중에서도 큰것이란 의미라 한다.

 

 

 

경복궁의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히 해서 다스려라 그렇치못하면 쇠약해져서 무너져버리는 것이 자연적이치라는 의미

근정전 앞에 18품계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는데 정1품 으로부터 종9품까지 그 품계대로 선다.

 

 

 

 

 

 

 

 

 

 

 

 

사정전은 왕이 신하와 함께 나랏일을 논의하는 편전으로 생각하여 바른 정치를 하게 한다는 의미

사정전 내부의 어좌와 일월오봉도, 병풍위의 수묵화는 운룡도인데 왕권의 위엄을 상징한다.

운룡도와 지붕의 천연단청이 조화를 이룬다

 

 

 

강령전은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승하한 곳으로 30 여년간 세종을 보필하면서 세자로 지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고 계승한 12세의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강원도 영월에서 17세의 어린나이로

죽을때까지 조선의 큰 아픔을 간직한 곳이지만, 강녕전의 의미는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을 말함인데

이는 서경에 나오는 다섯가지복 중에서 즉 오복을 대표하는데  정도전은 임금이 마음과 덕을 닦음으로써

강녕을 누리고 오복을 향유하기를 바라는 의미라하여 아이러니하기가 그지없다.

 

 

 

 

 

 

 

교태전의 첫주인은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인데 (세종22년,1440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슬하에 두었으나

그 아비인 영의정 심온이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오는도중에  

역적으로 몰려서 사사되기까지 하였으니  소헌왕후의 아픔이 오죽했을까! 사가의 아버지와 그 혈육들이

시아버지인 태종에게 모두 사사되었으니 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한 경회루는 태종12년(1412) 만들어졌는데 양녕대군이 그 편액을 썼고 하륜이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외국사신 접견과 군주와 신하간의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도 사용

경회루앞에서 30 여분정도쉬면서 한여름 더위를 식혔는데 어디서 왔을까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어느샌가 보송뽀송한 기분이 들었다.

 

 

 

 

 

 

 

동쪽에는 햇볕을 마음껏 쪼이고 있는 장독대가 있는데 임금님 수랏상에 올라갈 맛있는 장이 무르익고 있었다.

 

 

 

 

 

 

향원정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회루 서북쪽에 1867년 이후에 만든 곳인데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이곳은 건천궁에서 연결된 취향교란 구름다리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되었고 지금의 다리는

1953년 새로 놓은 것이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명성황후가 왜 낭인들에 의해서 시해당한 곳인 건천궁

 

 

 

 

 

민비(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건천궁내의 곤령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