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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에서

사색의 산책 2015. 1. 18. 23:09

 

    금년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일본 정부는 그들의 늑탈적인 습성을 못버리고

역사왜곡과 독도에 대한 그들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독립기념관에

아내와 함께하였다

 

 

1897년 서재필의 주도로 완공된 독립문은 중국 청니라에 대한 사대의 상징이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스위스인으로 알려진 세레진 사바친이 설계하여 지은 자주독립의 상징적인 건조물로서 현재는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다.

나라잃은 민족과 국민의 곤란한 상황은 말로는 형언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서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충남 당진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남상락 애국지사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태극기.

겨레의 탑 앞에서 , 자주,독립,통일,번영의 의지를 표현한 51.3m의 한도룡씨 작품인 겨레의 탑은 한민족의 비상과

불굴의 독립정신및 국민의 통일염원등이 담겨있다.

백두산 천지의 부조가 조각된 웅비하는 그 기상을 상징하듯 불굴의 독립정신과 강인한 한국인 상이 환조된 독립투쟁의

한국인 상 앞에서...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등을 계기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후 법령제정권,행정권,관리 임면권등의

내정권을 박탈한 이른바 한일 신협약으로  그 중심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하여 하얼빈 역 앞에서 처형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체결된 이른바 정미7늑약은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통치화 하는 절차였다.

손병희등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당위성등을 전세계에 알렸다.

순종황제때인 1909년(융희3년) 1892년 부터 발행되어 사용해온 구 백동화의 사용폐지를 알리는 고시

 

3.1 독립 선언서

한인 애국단의 단원으로  1932년 1월 8침략의 수괴인 일본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 후 32세의 나이로

사형 당하였는데  이봉창의사의 한인애국단 서약서이다.

상해 홍쿠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수뇌부의 전승 기념식에 맞추어 도시락과 수통에 폭탄을 장착하여

투척으로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 대장등을 사상케하여, 1932,12,19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 당하였다.

 

남한은 미군이 북한은 소련이 신탁통치 한다는 것에 반대 입장을 밝히는 이승만의 성명서

동학의 교리서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현시금 전국민이 독도 지킴이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정부는 체계적인 자료및 증거물등을 이용하여 그들의 역사왜곡과 후안무취한 늑탈적인 의도에 대한

방비를 하여야 한다.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