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顯忠詞)
여행지:충남 아산 염치면 백암리 현충사(顯忠詞)
여행일시:2025,05,18,일요일,10:00~11:30
여행인원:아내와 둘이서
여행소감:
충무공 (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
관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바,
현충사 경내를 돌아보며 외가에서 무과를
준비하며 보낸 시간속에서 31세의 나이인
1576년(선조9년) 2월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파란만장한 관직생활의
시종을 이룬 공의 삶이 우리 민족의 자존을
지켜냄과 동시에 세계 해군사에 획을 그은
명량대첩,한산대첩등 성웅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시점에 서서,
일본 적장이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자신의 후손들에게
남긴 말을 새삼 떠올려본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 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함께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명량대첩전에 공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 남아있습니다"
공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필생즉사)의
불퇴전의 의지로 부하들을 독려하여
대승을 이끌어 낸다.
백척간두에선 나라와 민족을 왜군의
침입으로 부터 23전 23승 전승으로 구해 낸,
성웅 이순신의 영전에 서서 마음으로부터
깊히 감사의 예를 올린다.
성웅 이순신 영정앞에서
현충사 출처:국가유산청 현충사 관리소
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1932년에 중건한 옛 사당 위편에
새로운 현충사를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2011년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현충사 영정앞에서 분향
현충사 충의문
현충사 전경
산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현충사내 연못,
현충사 홍살문
고택근처 수령이 570 여년이 넘은 은행나무
1960년대까지 고택의 후손들이 이용하던 우물
현재는 탐방객들이 마시는 물
고택내부의 전경
고택 내부 대청마루
고택 전경
현충사 내부의 충무문 전경
정려
잉어의 유영이 자유롭다
산수국
현충사 내부 위치정보표시.
1565년(명종 20년), 20세의 이순신은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여 훗날 이회, 이울, 이면 등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1597년(선조30년) 세째아들 이면은 21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공의 장인,장모의 묘